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버트 맥나마라 (문단 편집) === 베트남 전쟁의 실패 === || {{{#!wiki style="margin:-5px -10px;" [[파일:external/graphics8.nytimes.com/mcnamara_650.1.jpg|width=100%]]}}} || 하지만 맥나마라는 [[존 F. 케네디|JFK]]의 사망 이후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'''[[베트남 전쟁]]'''에 대해서는 자신 스스로 훗날 후회할 결정을 내렸다. '''사실 오늘날 맥나마라에 대한 까임거리는 8할 이상이 베트남 전쟁에 관한 것이며, 이는 맥나마라의 [[흑역사]]로 꼽기에 손색이 없다.''' 남베트남이 상상 이상의 막장이었음을 알고도 [[도미노 이론]]에 지레 겁먹어서 [[통킹만 사건]] 같은 작은 일에 [[홍콩행 게이바|들어오기는 쉬워도 나가는 것은 어려운 전쟁]]으로의 본격적인 개입에 나섰고, [[롤링썬더 작전|돈만 쳐들이고 효과는 미미했던 북폭]]은 역사가들이 훗날 그에 대한 평가를 낮게 보는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. 사실 맥나마라도 초창기에는 베트남 전쟁 개입을 반대하다가 결국 찬성 쪽으로 돌아섰는데, 계속해서 돈은 쳐들이는 데 효과가 없으니 전면적인 재검토가 불가피하다는 의견을 피력하려 했지만, [[린든 B. 존슨]] 행정부에서는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[* 물론 [[남베트남]]이 하도 막장이라 LBJ로서도 어쩔 수 없는 면이 있긴 했다. ] 줄창 불벼락을 내려댔다. 단적으로 공산권에서 계속 들어오던 전쟁수행 물자나 각지에 산개한 북베트남 산업시설의 분포도만 봐도 [[도쿄 대공습|하노이 핫]]으로 북베트남의 전쟁수행 능력을 꺾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. 결국 LBJ 행정부에서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줄어들었고, 1968년 2월 29일 클라크 클리퍼드에게 바통을 넘기며 국방장관직에서 물러났다. 말년에 사이가 벌어지기는 했지만 7년의 재임기간은 역대 미 국방장관 중 최장기 집권이었으며, 퇴임하며 대통령 자유 훈장(Presidential Medal of Freedom)을 받았다. 베트남 전쟁 과정에서 맥나마라가 유일하게 건진 긍정적인 성과는 [[M14 소총]]을 제식 소총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[[M16 소총]]을 도입한 것이다. 국방장관 재임 당시 사사건건 의견이 충돌했던 [[커티스 르메이]]와 의견이 일치한 유일한 안건이었다. 베트남 전쟁 과정에서 부족한 병력을 채우기 위해 하위 지능자를 입대시키는 Project 100K[* 100K는 10만을 뜻하는 미국 속어다. 쉽게 말해 이런 하위 지능자들까지 군대에 집어넣어 [[십만양병설|10만 명의 병력을 새로 만들어내 베트남에 집어넣겠다는 것]].--미국판 십만양병설?--]를 제안했다. 결과적으로 크나큰 실수로 평가 받고 있다. 자세한 내용은 [[장애인 징병#s-3.2]] 문서의 미국 항목을 참조.[* 결론만 말하자면, 이렇게 뽑힌 미군 병력들이 베트남의 최일선에서 동료 미군 장병들에게 받은 평가로 ''''McNamara's Follys(맥나마라의 바보들)'이라고 불릴 정도'''면 '''다행이었을 정도였고, 보통은 'McNamara's Morons(맥나마라의 머저리들)'이라고 불릴 정도로 처참했다.''']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맥나마라는 베트남 전쟁 종전 20년 후에 회고록 「베트남전쟁의 비극과 교훈」을 내면서 미국이 실수했고, 자신이 잘못된 전쟁을 일으켰다고 인정했다. 그는 이 자서전에서 ‘베트남전쟁은 잘못된 전쟁이었다. 몸서리치게 잘못된 전쟁이었다(Vietnam war was wrong, terribly wrong)’라고 말하며, 베트남전쟁이 방향도 잃고 목표도 없는 전쟁으로 끝났다고 스스로 비판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